백범 김구의 삶과 독립의 소원: '백범일지'에서
백범 일지 김구
상권 1929년, 하권 1943년 나의 소원 1947년
애초에 이 글을 쓸 생각을 낸 것은 내가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내 몸에 죽음이 언제 닥칠는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나의 지난 일을 알리고자 하는 동기 에서였다
이렇게 유서 대신으로 쓰는 것이 이 책의 상편이다
그리고 하편 은 윤봉길 의사 사건 이후 중일 전쟁의 결과로 우리 독립운동의 기지와 기회를 잃어,
이 목숨을 던질 곳이 없이 살아남아서 다시 오는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으나,
그때 내 나이 벌써 70을 바라보아 앞날이 많지 않으므로
주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를 염두에 두고,
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나의 경륜과 소감을 알리려고 쓴 것이다.
이것 역시 유서라 할 것이었다
국가 이념 철학
나의 소원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라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 없다.
내 과거의 70 평생을 이 소원을 위해 살아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달하려고 살 것이다.
독립이 없는 백성으로 70 평생에 설움과 부끄러움과 애탐을 받은 나에게는 세상에 가장 좋은 것이 완전하게 자주독립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보다가 죽는 일이다.
옛날 일본에 갔던 박제상이 내 차리리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 왕의 신하로 부귀를 누리지 않겠다 한 것이 그의 진정이었던 것을 나는 안다.
박제상은 왜 왕이 높은 벼슬과 많은 재물을 준다는 것도 물리치고 달게 죽임을 받았으니 그것은 차라리 내 나라의 귀신이 되리라고 함에서였다.
세계 인류가 네요, 내요 없이 한집이 되어 사는 것은 좋은 일이요 인류의 최고요 최후인 희망이요 이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멀고 먼 장래에 바랄 것이요
현실의 일은 아니다.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현 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으로서 해야 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하는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 민족의 생활을 보장할 수 없을뿐더러 우리 민족의 정신력을 자유로 발휘하여 빛나는 문화를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전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운 뒤에는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날의 인류의 문화가 불완전함을 안다.
나라마다 안으로는 정치상 경제상 사회상으로 불평등 불합리가 있고 밖으로 국제적으로는 나라와 나라의 민족과 민족의 시기, 알력, 침략
그리고 그 침략에 대한 보복으로 작고 큰 큰 전쟁이 그칠 사이가 없어서 많은 생명과 재물을 희생하고도 좋은 일이 오는 것이 아니라 인심의 불안과 도덕의 타락은 갈수록 더하니 이래 가지고는 전쟁이 그칠 날이 없어 인류는 마침내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 세계에는 새로운 생활 원리의 발견과 실천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담당한 천직이라고 믿는다.
이러하므로 우리 민족의 독립이란 결코 삼천리 삼천만의 일이 아니라 진실로 세계 전체의 운명에 관한 일이요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곧 인류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오늘날 형편이 초라한 것을 보고 자굴지심을 발하여 우리가 세우는 나라가 그처럼 위대한 일을 할 것을 의심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모욕하는 일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청년 남녀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제힘을 기르기로 낙을 삼기를 바란다.
젊은 사람들이 모두 이 정신을 가지고 이 방향으로 힘을 쓸진대 30년이 못하여 우리 민족 은 괄목상대하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나의 정치 이념은 한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
자유란 무엇인가 절대로 각 개인이 제 못 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 하면 이것은 나라가 생기기 전이나 저 레닌의 말 모양으로 나라가 소멸된 뒤에나 있는 일이다.
국가 생활을 하는 인류에게는 이러한 무조건의 자유는 없다.
왜 그런고 하면 국가란 일종의 규범의 속박이기 때문이다.
국가 생활을 하는 우리를 속박하는 것은 법이다.
개인의 생활이 국법에 속박되는 것은 자유 있는 나라나 자유 없는 나라나 마찬가지다.
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 데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개인 또는 일계급에서 온다.
일개인에서 오는 것을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일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독재라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독재의 나라가 되기를 원치 아니한다.
독재의 나라에서는 정권에 참여하는 계급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른 국민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 독재다.
군주나 기타 개인 독재자의 독재는 그 개인만 제거되면 그만이어 니와 다수의 개인으로 조직된 한 계급이 독재의 주체일 때에는 이것을 제거하기는 심히 어려운 것이니 이러한 독재는 그보다 큰 조직의 힘이거나 국제적 압력이 아니고는 깨뜨리기 어려운 것이다.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 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 또 아니요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 역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홍익인간이라는 우리 국조 단군이 이상이 이것이라고 믿는다
또 우리 민족의 재주와 정신과 과거의 단련이 사명을 달성하기에 넉넉하고 우리 국토의 위치와 기타의 지리적 조건이 그러하며 또 1차 2차의 세계 대전을 치른 인류의 요구가 그러하며 이러한 시대에 새로 나라를 고쳐 세우는 우리의 서있는 시기가 그러하다고 믿는다
우리 민족이 주연배우로 세계무대에 등장할 날이 눈앞에 보이지 아니 하는가
이 일을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사상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 양식의 건립과 국민 교육의 완비다
내가 위에서 자유와 나라를 강조하고 교육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최고 문화 건설에 사명을 다해야 한다.
대한 사람이라면 간 데마다 신용을 받고 대접을 받아야 한다
우리의 적이 우리를 누르고 있을 때에는 미워하고 분해하는 살벌 투쟁의 정신을 길러서 거니와 적은 이미 물러갔으니 우리는 증오의 투쟁을 버리고 화합의 건설을 일삼을 때다
집안이 불화하면 망하고 나라 안이 갈려서 싸우면 망한다.
동포 간의 증오와 투쟁은 망조다.
우리의 용모에서는 화기가 빛나야 한다.
우리 국토 안에는 언제나 춘풍이 태 당하여야 한다.
이것은 우리 국민 각자가 한번 마음을 고쳐먹음으로써 되고 그러한 정신의 교육으로 영속될 것이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주장하되 그것은 저 짐승들과 같이 저마다 제 배를 채우기에 쓰는 자유가 아니요
제 가족을 제 이웃을 제 국민을 잘 살게 하기에 쓰이는 자유다.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다.
우리는 남의 것을 빼앗거나 남의 덕을 입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가족에게 이웃에게 동포에게 주는 것으로 낙을 삼는 사람이다.
우리 말에 이른바 선비요 점잖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게으르지 아니하고 부지런하다.
사랑하는 처자를 가진 가장은 부지런할 수밖에 없다.
한없이 주기 위함이다.
힘든 일은 내가 앞서하니 사랑하는 동포를 아낌이요
즐거운 것은 남에게 권하니 사랑하는 자를 위하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 네가 좋아하던 인후지덕이란 것이다.
이러함으로 우리나라의 산에는 삼림이 무성하고 들에는
오곡백과가 풍성하며 촌락과 도시는 깨끗하고 풍성하고 화평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동포 즉 대한 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얼굴에는 항상 화기가 있고 몸에서는 덕의 향기를 발할 것이다.
이러한 나라는 불행하려 하여도 불행할 수 없고 망하려 하여도 망할 수 없는 것이다.
동포 여러분 이러한 나라가 될진대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네 자손을 이러한 나라에 남기고 가면 얼마나 만족하겠는가.
옛날 한토의 기자가 우리나라를 사모하여 왔고 공자께서도 우리 민족이 사는 데 오고 싶다고 하셨으며 우리 민족을 인을 좋아하는 민족이라 하였 으니 옛날에도 그러하였거니와 앞으로는 세계 인류가 모두 우리 민족의 문화를 이렇게 사모하도록 하지 아니하려는가.
나는 우리의 힘으로 특히 교육의 힘으로 반드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우리나라의 젊은 남녀가 다 이 마음을 가질진대 아니 이루어지고 어찌하랴 나도 일찍이 황해도에서 교육에 종사하였거니와 내가 교육에서 바라던 것이 이것이었다
내 나이 이제 70이 넘었으니 직접 국민교육에 종사할 시일이 넉넉지 못하거니와 나는 천하의 교육자와 남녀 학도들이 한번 크게 마음을 고쳐먹기를 빌지 아니 할 수 없다.
1947년 샛문 밖에서.
백범 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 (음력 7월 11일) ~ 1949년 6월 26일)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통일 운동가, 정치인이다.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72세) 백범은 암살범에게 암살되었다.
대일 의열 단체 한인애국단을 이끌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을 역임하였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양반가의 후손으로 태어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 이후 동학 농민혁명에 참가하였고, 한때 불교 승려로 활동했으며 자(字)는 연하(蓮下), 처음 이름은 창암(昌巖)이고, 호(號)는 백범(白凡), 연상(蓮上)이다.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다.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6세(1912년)에 거북 '구'(龜)였던 이름을 아홉 '구'(九)로 바꾸었다.
그 밖에 환속 이후의 이름인 두래(斗來), 피난 시기에 사용한 가명인 장진(張震), 장진구(張震球)도 있었다.
젊어서 동학교도였고, 불교에 귀의해서 법명 원종(圓宗)을 얻은 승려였으며, 28세 때 부친 탈상 후 기독교에 입문하였다.
양산 학교, 보강 학교 등에서 교육자로 교편을 잡기도 했고, 해서 교육 총회 학무 총감으로도 활동했다.
교육·계몽 운동 중 일본 제국 경찰에 연행되어 수감되기도 하였다.
김방경의 25대손으로 본관은 구 안동이며, 황해도 해주 출신이다.
1919년 이후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등을 지냈다.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 성과를 얻지 못하자 1921년 임시 정부 내 노선 갈등 이후 일부 독립운동가가 임시 정부를 이탈하고, 만주사변 이후에 일본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중국 관내 여러 지역으로 임시 정부를 옮겨 다녔으며, 1924년에는 만주 대한 통의부 박희광(朴喜光) 등을 통한 친일파 암살 및 주요 공관 파괴, 군자금 모집 등을 비밀리에 지휘하였고, 1931년에 독립운동 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의 동경 의거,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사건 등을 지휘하였다.
1926년 12월부터 1927년까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임시정부 국무령을, 이후 국무 위원, 내 무장, 재무장 등을 거쳐 1940년 3월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 임시정부 국무 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임시정부 법통 운동과, 이승만, 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과 미소 공동위원회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1948년 1월부터 남북 협상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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